マキロンS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형광등의 작은 소음이 거슬려 스위치를 끄자 완연한 어둠이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이유 없이 마음이 술렁이는 밤이 있었다.

사실은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나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혼자뿐인 집안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다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이 닿은 곳은 구석의 화장대 거울이었다. 아무렇게나 집히는 대로 화장품을 고르고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다지 섬세하다고 묘사할 수는 없는 손길이었다. 이미 붉은기로 얼룩진 눈가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색조를 물들이고 길게 뺀 아이라인을 그렸다. 그제야 마음 한 켠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충족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옷까지 갖춰입은 후 토요코 거리로 외출한다면 그 일원 중 하나로 쉽게 받아들여지겠지. 특유의 옷차림과 화장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일종의 갑옷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타츠 라쿠하는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열심히 바른 티는 났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껏 제 모습이 마음에 든 적이 있기나 했던가. 그럼에도 누군가 그런 저를 필요로 해 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라고 칭하기에는 바라는 상대가 너무나 선명했지만 일단은 공백으로 두었다. 평소보다 봐줄 만한 모습이라고 선심 쓰듯 던지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벌레 보듯 경멸하는 시선이라도 주워 먹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거짓말같이, 기적처럼…….

 

[전화 줘 ^w^]

 

휴대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그것도 가장 기다리던 사람에게서.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휴대폰을 집어들어 전화를 걸었다. 메시지를 받은 지 채 3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동시에 귓가에 익숙한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한 번. 두 번. 신호음이 기계적으로 반복될수록 방금 전까지 차오르던 기대감이 빠르게 불안으로 변질되었다. 열 번의 신호음이 넘어가자 라쿠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괜찮아. 이즈미 씨는 나와 달리 바쁜 사람이고 이런 늦은 밤이니까, 그새 다른 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방금 막 화장한 눈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라쿠하는 다시 기계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어둠 속 방안을 공허하게 채웠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을지도. 메시지를 너무 빠르게 읽었나. 아니면 너무 느리게…… 끝도 없는 자책과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어떤 목소리든 괜찮으니 듣고 싶었다. 귀찮다는 듯 짜증 섞인 음성이라도 좋았다. 제발 자신이 여전히 그녀의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껏해야 5분에서 10분 사이일 테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여보세요?”

익숙하고 경쾌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순간 라쿠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온몸을 옥죄던 불안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끊어졌던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진 느낌이었다…….

“이즈미 씨…….”

“미안 미안. 여기 시끄럽고 무음이라!”

아마 휴대폰 화면에 찍힌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기록을 봤을 테지만, 하야토는 전혀 미안하지도 신경쓰지도 않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그런 건 상관 없어진 지 오래였다. 휴대폰 너머로 시끄러운 번화가의 소음이 들려왔다. 라쿠하는 그 소음과 함께 이어질 다음 문장을 잠자코 기다렸다.

“하 쨩, 지금 잠깐 나올 수 있지? 네가 꼭 필요한 일이 생겨서.”

 

어쩌면 그녀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잘 다루는 사람일지도.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달콤한 말을 해 줄 리가 없었다. 아이를 다루듯 부드러운 애칭과 길게 늘어지는 말투에 가장 듣고 싶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야토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광장 근처의 편의점. 15분 뒤. 돌아오는 대답과 함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에 닿았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턱끝까지 숨이 찰 만큼 죽도록 뛴다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시간이었다. 무작정 긍정한 후 전화가 끊기자마자 라쿠하는 옷장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옷을 골랐다. 시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야토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외양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다. 검은색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와 레이스가 달린 오버 니삭스까지. 방금 전 전화 소동의 여파로 번진 눈화장도 면봉으로 지워냈다. 더 손봐야 할 곳은 산더미 같았지만 입술을 짓이기며 참았다.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건 최악이었다.

신발을 거의 구겨신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다시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저, 지금 출발……”

“아저씨, 기다려 줘. 지금 통화 중이잖아?”

라쿠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전히 시끄러운 소음 속 하야토는 누군가를 상냥하게 제지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아저씨라는 호칭이라면…… 손님이려나. 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모든 신경은 통화 너머의 상황을 훔쳐듣고 짐작하는 일에 쏠렸다. 그 사이 하야토와 낯선 남성 사이에서는 몇 번의 대화가 더 오갔다. 집중하라고? 아하하, 조금만 기다려. 아저씨도 분명 좋아할 걸…….

“라쿠하 쨩은 그냥 집에 있는 게 좋겠어. 내가 그쪽으로 찾아가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네.”

드디어 이름이 불린 후에는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매정하게 전화가 끊어졌다. 라쿠하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의 방문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즈미 하야토가 제 물건을 사용하고, 제가 쓸고 닦은 바닥을 밟고, 제 체취가 묻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건 단연 찬란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라쿠하는 제 보금자리에서 안정을 찾는 여느 짐승과 조금 다른 부류였다. 하야토가 떠나고 다시 텅 빈 집에 남는 게 싫었다. 이미 예정되어 있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해서 라쿠하는 물밑에서 수많은 노력을 반복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기라도 하면 그녀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자세를 바꾸거나 재채기를 하면 하야토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바뀔까 봐. 그래서 당장이라도 가버릴까 봐……. 그래서 하야토가 집에 올 때는 종종 내장까지 뒤집어 내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나 황홀하고 비굴했다.

집으로 돌아온 라쿠하는 아까 어지른 화장품과 옷가지를 치우기 시작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컸다. 분침이 한 칸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초조하게 손끝을 물어뜯는 버릇이 도졌다. 짧게 깎은 손톱 주변 살갗이 금세 너덜너덜해졌다. 하야토는 왜 갑자기 집으로 오겠다고 한 걸까. 네가 필요한 일이라는 건 대체 뭘까.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현관문 쪽에서 익숙한 전자음이 들려왔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마치 제 집처럼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그 소리에 라쿠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의 귀가를 확인한 개처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이즈미 씨! 너무 늦으셔서, 저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하야토는 평소와 다름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에서 막 실내로 들어와 붉게 달아오른 뺨. 짧은 머리카락에서 흩어지는 달콤한 향을 맡자 라쿠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풀어졌다. 비슷한 긴장 상태라도 그녀를 시야에 담고 있을 때와 아닐 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대답 대신 입가에 걸린 짓궂은 미소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하야토는 곧 입을 열어 말했다.

“아아, 별 건 아니고. 찾을 게 있어서 그랬어. 짠!”

반쯤 열린 문에 가려졌던 또 하나의 방문객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술기운이 역력한 얼굴에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가 헤실거리며 라쿠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순간 몸이 굳었다. 하야토는 그런 라쿠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모처럼 새 고객님을 모시고 왔는데. 싫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스스로 문을 여는 라쿠하의 옆모습에 만족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뒤에서 걸음을 휘청이던 남자부터 기다렸다는 듯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쪽을 먼저 들여보내기 위해 문을 연 게 아닌데. 라쿠하가 티나지 않게 입 안쪽 살을 깨무는 사이 남자는 비좁은 자취방을 탐색하듯 둘러보며 노골적으로 품평을 시작했다. 여자애 집에 이렇게 쉽게 들어오다니, 운이 좋네. 생각보다 아늑하고. 밤새 이것저것 시도할 공간도…… 하하! 남자는 불쾌한 첫인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더러운 농담을 하고 방 안에 놓인 물건을 허락도 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가는 것을 본 하야토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라쿠하가 다소 멍하게 이 상황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이 몇 번의 대화가 더 오갔다.

이내 하야토는 익숙하게 낯선 남자를 침실로 이끌었다. 라쿠하의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라쿠하는 곧 벌어질 상황에 대해 미약한 공포와 불쾌감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저 남자가 어서 둘을 내버려두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어질 과정을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문턱을 넘자마자 하야토는 라쿠하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침대 위에 앉혔다. 분명 평소보다도 창백한 안색을 마주했을 텐데도 손끝에 일말의 주저가 묻어나지 않았다. 라쿠하 역시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여자아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떠밀렸다. 늘 그랬듯 힘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야토의 손은 그대로 라쿠하의 블라우스로 향해 가슴을 위로 들어올렸다. 라쿠하는 당혹스러운 숨을 들이켰지만 그녀를 피하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면을 응시한다면 남자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마주보게 될 테니 고개를 조금 옆으로 틀 뿐이었다. 봐요 아저씨. 엄청 크지? 하야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가 아주 가까이에서 울렸다. 귀여운 말투에 담긴 천박한 내용이 괴리를 일으켰다. 남성의 목울대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술기운과 욕망에 잔뜩 흐려진 눈을 하고 그는 물었다. 마치 자신이 아직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역겹게도.

“이지메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헤에, 무슨 말이야?”

“네 친구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데. 강제는 별로라고.”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였던 하야토는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맑고 명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마치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그 사이 라쿠하의 가슴을 만지던 손길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조금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방금은 남성에게 내보일 전시를 위한 몸짓이었다면, 이번에는 라쿠하의 약한 곳을 정확히 알고 파고드는 것에 가까웠다. 하야토는 뒤에서 라쿠하를 끌어안듯 꼭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라쿠하 쨩, 정말이야? 즐겁지 않은 거야?

“즐거워요…….”

하야토는 남성의 시선을 피해 눈을 꼭 감았다가 말했다. 옷 위로 돌기를 만지는 손가락과 목 뒤로 느껴지는 열기에 목소리가 튈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럼 스스로 벗어 볼래? 상냥한 목소리로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문장이 끝나자마자 귓바퀴를 깨물리는 감각이 살짝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라쿠하가 망설이는 아주 짧은 순간 하야토의 손길이 다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블라우스 위로 유두를 지분거리며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곧 덜덜 떨리는 라쿠하의 손가락이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를 더듬었다. 작고 동그란 단추 구멍에 단추를 밀어 넣는 간단한 행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손끝에 감각이 없는 듯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이어지는 침묵이 라쿠하를 더욱 숨 막히게 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기대감에 찬 시선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아 수치심에 얼굴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툭. 첫 번째 단추가 풀렸다. 그 작은 소리가 방 안에 왜 그렇게 크게 울리는 걸까. 시선은 제 무릎 근처 어딘가에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공기가 맨살에 닿는 감촉이 소름 끼치게 생경했다.

블라우스 단추를 모두 풀자 하야토가 만족스럽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라쿠하는 천천히 블라우스를 어깨 아래로 벗어 내렸다. 팔을 빼내는 동작이 어색하고 뻣뻣했다. 하얀 어깨와 가녀린 팔이 어두운 조명 아래 드러났다. 남자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예고도 없이 하야토가 뒤에서 속옷의 후크를 풀었다. 동시에 가슴을 감싸고 있던 천이 느슨해지며 앞으로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가슴이 완전히 드러났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노출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지만 등 뒤의 하야토가 그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착하네, 라쿠하 쨩은.”

입 맞춰도 돼.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듯 떨어진 허락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쿠하는 기다렸다는 듯 하야토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절벽 끝에서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처럼 그녀는 하야토의 목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입술을 부딪혔다. 하야토는 작은 웃음 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라쿠하의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남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그 앞에서 자신이 반쯤 벗고 있다는 현실도 이 순간만큼은 희미하게 멀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단순한 흥분보다도 마비 혹은 도취 상태에 가까웠다.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무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영원은 없었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입술을 먼저 떨어트린 것은 하야토 쪽이었다. 그녀는 만족감과 즐거움이 뒤섞인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몰아쉬는 라쿠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격렬했던 감각이 사라지고 다시 수치심과 불안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야토는 그런 라쿠하의 표정 변화를 즐기듯 바라보며 그녀의 맨가슴을 가볍게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왜 구경만 하고 있어?”

그 말과 동시에 하야토는 제 손 위에 남자의 손을 이끌려는 듯한 시늉을 했다. 남자는 방금 본 광경에 살짝 압도당한 듯 넋을 놓고 있다가 헛웃음과 함께 팔을 뻗었다.

라쿠하는 거부감에 몸서리치며 하야토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애원과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하야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뒤엉켜 있었다. 라쿠하는 자신을 절벽 끝으로 내모는 여자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가슴 위 하야토의 손 위에 겹쳐졌다. 하야토의 손과 거의 함께임에도 그 무게감과 불쾌한 온기가 생생했다. 라쿠하는 눈을 질끈 감는 대신 하야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순간마저도 자신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야토뿐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것 같았다. 하야토는 그런 라쿠하의 눈빛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자신을 향한 열망과 선명한 괴로움이 뒤섞인 표정에서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네가 괴로워하는 게 너무 좋아.

그러니 너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내가 기꺼이 망가져 주겠다는 거야.

 

곧 하야토는 라쿠하의 가슴을 제 좋을 대로 희롱하던 남자의 손길을 슬쩍 밀어냈다. 그리고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자신을 응시하는 라쿠하를 향해 턱짓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방금 전까지 라쿠하의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함 대신 옅은 조소가 어려 있었다.

“저런 목석 같은 애 내버려 두고 이리 와, 아저씨.”

하야토는 지체 없이 남자의 팔을 잡아끌어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위로 올라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한동안 멍하게 있던 라쿠하는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눈으로 생생히 담았다. 그 전에도 없던 일은 아니었으나…… 제 집과 제 침대 위에서 이러는 것은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라쿠하는 침대 옆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 같은 것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강요받기라도 하는 듯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취한 남자는 하야토의 작고 마른 몸을 배려 없이 깔아뭉갰다. 힘으로 짓누르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쿠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저 남자가 아니라 내가 하야토를 안고 있었다면 저렇게 함부로 다루지 않았을 텐데.

아니 어쩌면…….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흰 목덜미를 깨물고 가녀린 팔을 부러질 듯 짓누르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영원히 저 침대에 묶어두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오직 내 시선 아래 내 마음대로……. 어느덧 라쿠하는 제 스스로를 관계 중인 남자에게 대입하고 있었다. 하야토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속에서 다리 사이가 천천히 젖어들었다. 라쿠하는 도착적인 흥분과 함께 깊은 자학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격렬했던 움직임이 잦아들고 남자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가 낄낄거리며 침대 아래의 라쿠하를 향해 가볍게 질문했다. 이제 너도 올라올래?

라쿠하는 대답이 없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 담배 연기를 뿜으며 침대 밑에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라쿠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드러난 라쿠하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관계 내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던 건지 얼굴 전체가 한껏 붉어지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화장은 이미 다 번져 엉망이었고 지금 이 순간조차 소리 하나 없이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 끊임없이 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된 채 미동 없었다.

남자는 순간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살짝 물렸다. 방금 전까지의 흥분과 만족감이 싸늘하게 식을 정도로 기묘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욕설을 중얼거린 남자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 몇 장을 꺼내 침대 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가 그대로 방을 나가 현관으로 향하자 곧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하야토는 현관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는 방금 전까지 격렬했을 행위의 여운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가 던지고 간 지폐에 눈길이 닿았다.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가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약속했던 금액보다 한참은 적은 액수였다.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었지만……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 미동 없는 라쿠하를 향해 시선이 옮겨갔다. 이미 반쯤 망가진 장난감을 마주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새로운 놀이 방법을 떠올린 아이처럼 천진하고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헤에, 액수가 모자라는데…… 아무래도 라쿠하 쨩 탓인가 봐.”

기분 나쁘게 울고 있으니까. 정신을 놓은 듯 멍하니 있던 라쿠하는 그 말에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의 광경과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상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하야토의 모습이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었고 살짝 부어오른 입술은 아직도 붉었다. 목덜미부터 허벅지까지 붉은 자국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남자의 흔적. 자신 외의 다른 누군가가 하야토에게 남긴 흔적. 그 사실이 라쿠하의 뒤틀린 소유욕을 다시금 격렬하게 자극했다. 역겨움과 질투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속이 메슥거렸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 저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강박적인 습관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깨끗히 소독해 줄 거지?”

 

-

 

커다란 개를 키우다가 깔려버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뜨겁고 축축하면서도 말랑하고 부드럽다고…… 하야토는 생각했다. 소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라쿠하는 침대로 올라와 그녀 위에 올라탔다. 남자가 남긴 흔적들 위로 집요한 입맞춤이 따라붙었다. 한참 전부터 상의를 벗고 가만히 있던 라쿠하의 몸은 제법 차가웠다. 그렇게 식은 살갗이 관계의 여파로 열이 오른 하야토의 몸에 닿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쾌감이었다.

헐떡이는 라쿠하의 커다란 살덩이가 흔들리며 서로의 가슴이 자꾸만 맞닿았다. 옷이나 다른 무엇의 방해도 없이 맨살끼리 부딪히는 감각은 날것 그대로였다. 돌기가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생경한 자극에 하야토는 저도 모르게 발끝을 안으로 살짝 말았다. 무릎이 오그라들고 입술이 달싹여졌다. 조금 전 남자와의 관계에서 적당한 타이밍이 떠오를 때마다 연기하듯 내뱉었던 기계적인 신음과는 달랐다.

하야토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것을 눈치챘는지 라쿠하는 더욱 열성적으로 목덜미와 어깨 부근을 지분거렸다. 입술로 핥고 잘게 깨물기도 하며 마치 영역 표시라도 하는 듯 집요하게 굴었다. 하야토는 라쿠하가 아마 그대로 자신의 살갗을 물어뜯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 안에 갇혀 널뛰는 감정들…… 하야토는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즐거웠다. 라쿠하의 얼굴에 고통과 혼란이 드러날수록 그녀 자신의 존재가 더욱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즐거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면 꽤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짓눌리는 감각과 피부 위를 훑는 축축한 자극이 계속되자 하야토는 무의식적인 허전함을 느끼며 엉덩이를 바르작거렸다. 채 가시지 않은 흥분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라쿠하는 그것을 알아차린 듯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한 손에 잡힐 만큼 작고 부드러운 가슴을 입 안 가득 물자 하야토 스스로도 실감할 만큼 아까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납작한 아랫배 위로 혀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핥기도 했다. 하야토는 눈을 감는 대신 라쿠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 굴욕적인 행위에서 정말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혹은 버려지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생존 본능이 앞서고 있을까. 둘 다일지도 모르지……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지금 자신의 발밑에서 충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야토는 제 허벅지를 애무하는 라쿠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라쿠하를 위해 남겨 놓은 게 떠올랐다. 

“아까 그 남자, 말인데…… 흐읏! 하, 중간에…… 뺐어.”

방금 관계를 가진 남자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라쿠하는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 투명한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아 우습고 즐거웠지만 아직 문장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 않았다. 하야토는 그녀를 위해 한층 더 선명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스스로도 내내 기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콘돔 말이야. 몰래 빼는 것 같던데…… 하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봐.”

어차피 라쿠하 쨩이 소독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야토의 손가락이 라쿠하의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언뜻 보면 칭찬하는 듯한 손길이었지만 라쿠하만은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통제임을 느꼈을 것이다. 옅은 통증과 함께 그녀의 머리가 하야토의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남자의 체취가 희미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다음 순간 라쿠하의 혀가 망설임 없이 갈라진 틈을 핥아 올리자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더어. 더 깨끗하게…… 해 줘. 라쿠하는 그 말에 더욱 매달렸다. 몸 안에 스며들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듯 굴었다. 남자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굳어버리는 여자아이가 그 채액을 빨아들이고 있다. 정성스레 혀를 굴려 필사적으로 핥아댄다. 하야토는 제가 만들어낸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라쿠하의 뒷머리를 좀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이내 가벼운 절정이 찾아왔다. 허리가 허공에 여러 번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라쿠하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안도감 같은 것이 비치는 듯했다. 하야토는 숨을 고르며 그런 라쿠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전부 깨끗해진 것 같아?

 

라쿠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땀과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얼굴, 풀어지고 젖은 머리카락, 발가벗은 상체 아래로 드러난 반쯤 걸치고 있는 스커트와 니삭스. 그 대비가 다시금 하야토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내 라쿠하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기자 순순히 끌려왔다. 하야토는 라쿠하와 마주 보는 자세로 앉은 채 그녀의 스커트마저 벗겨냈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이제 속옷 한 장만을 걸친 라쿠하의 다리를 끼우고 허리를 밀착시켰다. 라쿠하의 허벅지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부드러웠다. 

맨살이 맞닿는 감촉. 하야토는 라쿠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천천히 제 몸을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옷 천 너머로 라쿠하의 성기가 하야토의 것과 맞닿아 비벼졌다.

흐윽…… 라쿠하에게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당혹감과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뒤섞인 소리였다. 하야토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느릿하고 꾸준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서로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압박하고 마찰했다. 차가운 살갗이 점차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호흡은 눈에 띄게 가빠졌다. 하야토는 라쿠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특유의 체취와 샴푸 향이 섞여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평소에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감각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괜찮았다. 

하야토는 눈을 감고 서로의 몸이 비벼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직접적인 삽입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라쿠하가 달아오르며 제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드는 반응을 보일 때는 더욱 그랬다. 속옷 아래 질척이는 마찰음이 스쳤다.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쾌락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지배욕일지도 몰랐다……

호흡이 고점에 달했을 무렵 하야토는 라쿠하의 허리를 잡고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잔뜩 풀어진 라쿠하의 얼굴이 미처 해소되지 않은 열망으로 흐릿했다. 하야토는 대답 대신 라쿠하의 손을 잡고 그것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라쿠하의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은 입구에 닿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러나 곧 조심스럽게 입구를 더듬던 손가락이 하야토의 내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겁고 부드러운 감각이 라쿠하의 손가락을 감쌌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신경을 타고 그대로 심장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부드러운 내벽은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수축했다. 하야토의 가장 깊은 곳에 닿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찬 만족감이 밀려왔다. 비틀린 충족감이 라쿠하의 온몸을 빈틈없이 채웠다.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넣자 하야토가 숨을 짧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받아들이며 내부가 살짝 벌어지는 감각. 순간 자제력을 잃은 라쿠하는 더 깊숙히 파고들었다. 안쪽의 점막과 숨겨진 돌기들을 찾아내려 애쓰며 탐색하듯 내벽을 꾹 누르기도 했다. 하야토가 허리를 비틀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감히 자신의 손 안에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이 들어와 있다. 감히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미세한 경련이 느껴진다. 하야토 스스로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자신의 손길에 먼저 반응한다. 감히…….

“으읏…… 라쿠하 쨩.”

하야토가 간신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제지하지 않는 그 목소리에 라쿠하의 정신이 더 아득해졌다. 손가락을 구부려 가장 민감할 것 같은 부분을 긁어내리자 하야토의 허리가 굽었다. 곧 뜨겁고 묽은 소량의 액체가 울컥 쏟아졌다. 하야토는 라쿠하의 팔을 꼭 붙들고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신음 대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만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라쿠하는 천천히 그녀의 몸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액체가 혀끝에 감겼다. 어쩌면 남아있던 남성의 채액과 뒤섞였을지도 모르는 것을 핥으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하야토는 그 광경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풀썩 뒤로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조용한 방 안에 숨이 색색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고 가도 괜찮지? 하야토는 눈을 감고 한순간에 진이 다 빠져버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의 행위에 대한 어떠한 말도 없었다. 라쿠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침대, 정리할게요. 시트도 갈고…….

“그런 건 됐으니까 그냥…… 차라리 소파에서 자는 게 좋겠어.”

하야토는 졸음이 쏟아지는 듯 노곤노곤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고 거실로 나갔다. 좁을 텐데. 라쿠하는 생각했지만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한 사람이 누울 만한 크기의 소파에 두 사람이 구겨져 들어갔다. 새 이불을 꺼내와 덮자 나름 아늑한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라쿠하는 하야토의 등 뒤로 누워 작은 몸을 팔로 감싸 안았다. 등 너머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규칙적이고 평온한 소리에 방금 전까지의 격렬함과 혼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야토가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어가고 있다. 라쿠하는 눈을 감고 이 순간의 감각을 새기려 애썼다.

하야토는 금새 잠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라쿠하는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하야토가 제 품에 있는 지금도 금방이라도 깨어나 이 집을 떠날 것만 같았다. 잠에 빠져들기에는 이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때 하야토가 잠결에 뒤척이며 이불을 걷어찼다. 흰 어깨가 차가운 공기 밑에 드러났다. 라쿠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다시 덮어주려 손을 뻗다가 문득 멈추었다. 그녀의 이불이 되고 싶다. 그녀를 매일 깔아뭉개고, 보듬고,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가끔 걷어차이기도 하고 날씨에 따라서는 버림받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필요해지는 물건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라쿠하는 뻗었던 손을 거두는 대신 하야토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맨살에 닿는 하야토의 피부는 잠결에도 여전히 따뜻했다. 이불 대신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하야토는 잠결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 같았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fin